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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h/News

'초점과 시선' 展 최성석 & 양혜진 2인전

by choiss 2016. 9. 6.

'초점과 시선' 展 최성석 & 양혜진 2인전

양혜진&최성석 2인전'초점과 시선'전  Yang Hye Jin & Choi Sung Seok 'Focus & Sight' Twomen Show

상하이 윤아르떼 갤러리 Yoon Arte Shanghai 2016.08.27 sat ~09.25 sun

Opening 08.27 3Pm

미술작품은 때로 감상자에게 그가 잃어버린 것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어떤 감정을, 어떤 깨우침을, 심지어 잃어버린 자신을 작품을통하여 되찾게 해준다. 설령 작가가 그의 작품에 담긴 창작 의도를 명확하게 설명해주지 않더라도 감상자는 스스로 작품앞에서 자신의감각의 문을 크게 열기 시작한다. 심미적인 관찰의 일차적 순간이 지나면 감상자는 작품에서 뭔가를 읽어내려고 한다. 작가가 의도한 바를 스스로 파악하려 한다.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원하여 작품을 보는것이다. 마치 정현종의 시 ‘방문객’의 싯구를 생각나게 하는 일이다. "사람이 온다는건 / 실로 어머어마한 일이다. /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만약 “방문객”을“ 감상자” 로 바꾸어 본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사람이 그림을 본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그림을 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을까? 감상자가 스스로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결국은 자기 삶에 근거하여 그림을 보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결국 자신의 삶으로 그림을 본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질문해보자. 나는 무엇을 잃었을까? 당신은 무엇을 잃었나요? 어떤 그림은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주기도 하고 상실해 버린 특별한 감성을 회복해 주기도 한다. 우리는 하루하루 삶을 앞으로 밀어가는 가운데 새로 얻는 것이 있기도 하지만 더러는 잃어버리는 것도 있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중에는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혹시 우리자신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단단하게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것 같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물결치는 세파에 이리저리 밀려다니며 자신의 중심을 잃고 부유하는삶을 살고 있을지 모른다. 

 잃어버린 자신을 찾는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나는 세계와의 관계 속에서 어떤 맥락을 짓고 있는지? 이런 문제를 생각해 보는 것에서 자아를 회복하는 일이 가능할지 모른다. 지나왔던 길들, 지금서 있는 여기, 내일 다시 나아가게 될 아직은 불투명한 시공간들을 더듬으면서 내가 잃어버린 것, 잃어버렸으나 의식하지 못하는 것, 그러나 제대로 살기 위해서 되찿아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 보아야 한다.

 

 우리는 방심하면 미디어의 먹이감이 된다. 세상은 뉴스거리로 넘쳐나고 우리는 매체에서 보여주는 뜨거운 초점에 주목한다. 모두의 시선은 그 곳으로 쏠린다. 초점이 되는 사건, 인물, 상황의 진실은 매체의 태도에 따라서 쉽게 조작되는데 우리는 그들이 쏟아붓는 소나기를 피하지 못한다. 뉴스가 되는 것들에 나만의 시선을 갖지 않는 채 보도매체의 시선대로, 그들의 의도대로 편집된 내용을 보며 듣는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그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 그들이 편집하는대로 내가 쏠려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몰려가는 곳으로 내 시선 역시 편집자가 의도한 방향으로 떠밀려간다. 나는 개인이기를 잃어버리고 매체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군중이 되어간다.  

 그런 나는 종종 어딘론가 떠나고 싶어한다. 잃어버린 나를 찾아보고 싶어하는 것이다. 여행의 목적은 여행지에서 만나는 풍경을 바라보는 것에만 있지는 않다. 산이나 바다나 혹은 어느 낯선 거리를 바라보면서 오랜만에 자신의 문제들을 더듬어 보는 것이다. 그 곳에서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대면하는 것이다. 늘상 익숙한 장소에서는 자신을 잃어버린 채로 살아가다가 정작 낯선 장소에 이르러 오래만에 자신을 찾아 보려는 것이다. 그런데 낯설고 먼 곳으로 떠난 당신은 그 곳에서도 온전히 풍경을 감상하지 못하고 결국은 자기자신을 더 많이 보고 왔다는역설을 경험한다.

 알랭드 보퉁은 그의 에세이“여행의기술”의 에필로그 부분에서 우리에게 강조한다. 결국 어떻게 볼 것인가, 무엇을 볼 것인가가 여행을하는 기술이라고 한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먼 곳으로 떠나지 않더라고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곳을 낯설게 보고늘 새롭게 바라보면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여행지와 같을 수 있고, 내 일상의 삶이 여행일 수 있다. 가령 내가 매일 다니는 집 주변에 있는 풍경을 새롭게 보는 시선을 통하여, 자세히 관찰해 보는 시선을 통하여 나는 대상 속에서 많은 이야기들을 꺼내 볼 수 있고, 대상과 나와의 대화를 통하여 나 자신을 더 익숙하게 찾아 낼 수 있다. 세상에는 대부분의 시선이 쏠리는 뉴스거리가많으나 그런 뉴스의 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뉴스 편집자의 시선에 내가 왜곡되지 않으려면, 나는 뉴스에서 말하는 사건을 입체적으로 바라 볼 수 있는 나의 시선을 찾아야한다. 미술에서 입체주의자들이 대상을 360도의 시각에서 관찰하고 관찰한 것들을 단편화하여 대상의 진실을 찾으려했던 것 처럼, 우리는 떠들석한 이슈, 인물, 상황에 대한 쏠림의 평면적 시각, 직선적 시각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한다.

 어느 화가보다도 자연을 오래오래 관찰하면서 여러 각도에서 자연을 파악하고 진실을 표현하려했던 세잔처럼, 우리는 세상 사의 피상적인 모습만 쫒으며 모두가 바라보는 방향만을 덩달아 쫓아가는 미디어소비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나만의 시선을 가져야한다. 세잔처럼 내 집 안에있는 물건들로부터 시작하여 집앞의 풍경에서도, 내가 매일 마주하는사람들로부터도, 내가 매일일하는 사무실에서도, 내가 자주들리는 커피숍에서도, 내가 늘 지나다니는 거리에서도, 내가 늘 타고 다니는 전철 안에서도 나는 여행자의 시선을 가져야한다. 내가 만나는 모든 것이언제나 낯선 것일수 있어야 한다. 멀리 떠난 여행지에서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더듬어 보는 것처럼, 나는 내 일상속에서 나와 관계하는 모든 것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양혜진 작가의 작품들 속에는 다수의 사람들이 등장하며 카메라와 스마트폰이 손에 들려있다. 그들 모두의 시선은 한 곳을 바라보고 있다. 떠들석한 사건, 스타 연예인, 정치인등 초점이 된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의 눈빛 속에는 자신만의 시선이 보이지 않는다. 수없이 많은 카메라를 들이 밀고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대고 있다. 스마트폰, 카메라, 미디어 매체 등 편리한 것들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늘 떠들석한 장터로 모인다. 초점을 한몸에 받은 일들은 곧바로 인터넷을 통하여 더많은 사람들의시선을 모은다. 그런데 그많은 시선들이 한 곳에 집중되어 어떤문제를 진실한 방향으로 해결한 경우가 얼마나 있는가? 가령 양혜진 작가의 작품 ‘길을 잃다’의 이미지는 바닷 속 풍경처럼 보인다. 중심에는 한 사람이 물 속에 있다. 수영하고 있다기보다는잠겨있다라고 봐야할 것이다. 물고기들과 수많은 카메라들이 그 인물을 중심으로 원을 이루며 밀집해있다. 뉴스의 초점이 된 인물은 아마도 세월호와 함께 우리들과 슬픈이별을한 아이들을 은유하고 있을지 모른다. 수많은 카메라가 집중하고 있지만 세월호의 진실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초첨에 쏠리는 우리들에게 주는 경고이다. 누군가, 혹은 어느 특정 집단의 시선에 우리는 자신들의 올바른 시선을 강탈당한 것은아닌가?

 자신의 시선을 회복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멀리있지 않다. 당장 도서관으로 달려가서 엄청나게 많은 책을 읽을 필요도 없다. 서로 다른 관점들을 보여주는 다양한 매체를 전부 읽어 볼 필요조차도 없을 것이다. 때가 낀 이불을 박차고 침대에서 일어나듯일상의 장소를 탈출하여 먼 곳으로 여행갈 필요도 없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을 낯설게 보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그 안에 있는 풀, 꽃, 나무, 사물, 인물, 또 그러한것들에 비치는 햇빛과 그늘, 그것들을 덮는 밤의 어둠을 낯설게 관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매일 출퇴근하는 길에서 전철 안에서 버스 안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것을 다양하게 관찰해 보는 것이다. 모두의시선을 빼앗는 것에 나도 덩달아 쏠려가지말고 내 시선만으로 오래오래 바라보며 여러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세잔의풍경화가 그랬듯이 말이다. 

 최성석은 그런 시선의 소중함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다. 그는 사람들이 흔히 지나치며 주의하지 않는곳을 오래 바라본다. 자기 집을 나와서 길을 걷다가 길거리의 담벼락을 마주쳐도 오래 바라본다. 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도 오래 바라본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다. 담벼락을 오래 바라보면 도종환의 시 “담쟁이”가 떠오를 수 있다. 저것은 벽/ 어쩔 수없는벽이라고 우리가 느낄때/ 그 때/ 담쟁이는 말 없이그 벽을 오른다/ 물한방울 없고 씨앗한톨 살아 남을 수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파나는 담쟁이 잎 수천개를 이끌고 결국 그벽을 넘는다.

 양혜진 작가가 그의 작품을 통하여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를 최성석은 그의 작품으로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 자신의 주체적인 시선이 필요하며 유행처럼 떠들석한 초점들에 자신의 초점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 같은 양혜진 작가의 작품에최성석 작가는 자신만의 시선으로 오래오래 관찰하며, 그런 과정에서 자신의 주체적인 초점을 유지하는 실천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두 작가의 작품을 하나의 같은 공간에서 함께보면서 두 작가가 마치 토크쇼를 하는 것 같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작품을 감상하는 우리는 오래만에 내가 잃어버린 것은 나의 시선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시선을 되찾는다는 것은 나의 주체적 존재를 회복하는 일이다. 작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며 우리는 속으로 내밀하게 결심할지 모른다. 나도 이제부터 내가 매일 부딪게 되는 모든 것을 낯설게 새롭게 오래오래 관찰해야 겠다고.  -(박상윤 윤아르떼 갤러리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