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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h/Critique_Articles

전준엽의 미술산책-최성석

by choiss 2009. 7. 22.

[뉴시스아이즈]전준엽의 미술산책…최성석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서울=뉴시스】

“요즘 뭐 쓰니?” “작년부터 써 오던 거.” “그걸 아직도 쓰고 있어?” “아직 많이 남았는데….” “그렇게 같은 것만 써도 문제가 없어?” “나는 쓰던 걸 다 써야 다른 걸 쓸 수 있어.” “그래도 이번에는 이 걸로 한번 바꿔 봐.”

지난해 가을부터 쓰기 시작한 소설 방향을 놓고 고민하던 여자는 화장품 회사에 다니는 친구가 신제품을 내놓자 당황했다.

최근 읽은 수필의 한 대목이다. 같은 사안을 두고 이처럼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재미있다. 소설가에게 쓰는(write) 일이 화장품 외판원에게는 쓰는(use) 일이 되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입장에서 관심 있는 것만 보려고 하기 때문에 생기는 해프닝이다.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일이다.

볼거리가 너무 많은 세상이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그야말로 시각 정보의 홍수 속을 헤매고 다닌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밤낮의 구분 없이 볼거리가 넘쳐나고 있다. 매일 매일 마주치는 그 많은 시각 정보를 모두 기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들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 혹은 관심 있는 것만을 보는 것이다. 도시는 시각의 일방통행만이 이 현실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도시의 속성을 냉정한 시선으로 그려내는 작가가 최성석이다. 그는 도시에서 감수성을 키운 도시인이다. 그 감수성으로 길어 올린 현실은 어떤 모습일까.

‘오전 12시34분 청담역’이라는 제목이 붙은 작품을 보자.

제목이 말해주듯 서울 지하철 7호선 청담역 지하도를 그린 것이다. 자정을 넘긴 시간답게 적막감이 감도는 분위기다. 창백한 조명 속으로 승객으로 보이는 여자가 화면 깊숙이에서 황급하게 걸어가고 있다. 장암이나 온수로 가는 마지막 열차가 청담역으로 들어오는 중인 것 같다.

이 그림은 작가의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장면을 냉정하게 묘사하고 있다. 작가는 지금 이 장면 앞에서 지하도를 바라 보며 종종 걸음, 아니면 경보나 뜀박질을 하고 있는 중일 게다. 그가 바라보는 지하도의 장면은 이미 머리 속에 입력된 시각 정보의 복사본 수준에 불과할 뿐 새로운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작가는 그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전혀 새로운 감흥을 주지 못하는 도시 지하도 풍경을 왜 그렸을까.

◇원근법 반란으로 냉정한 시선 표출

그림을 조금 세밀하게 뜯어 보자. 매우 사실적으로 그렸지만 상식에서 조금 벗어나고 있다. 원근법의 반란이 보인다. 이 그림에서 가장 또렷하게 묘사한 부분은 중간참에 있는 장면이다. 눈에서 가장 가까운 쪽이 흐릿하게 처리돼 있다. 즉 근경이 초점을 벗어나 있다는 말이다. 화면 오른쪽 기둥에서 확연하게 보인다. 맨 앞에 있는 기둥이 희미하게 표현되어 있고, 눈에서 멀어지면서 뚜렷하게 그려지고 있다. 공기원근법(근경은 또렷하게, 원경을 흐릿하게 그려서 공간의 실재감을 살리는 방법)이 반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중경에다 초점을 맞춘 사진을 보는 느낌이다. 작가는 무슨 의도로 이처럼 상식이 비틀린 장면을 그렸을까. 막차를 놓치지 않으려는 심중을 담은 것이다. 제목에서 밝혔듯이 청담역 오전 12시34분이면 막차가 들어올 코 앞의 시간이다. 작가는 지금 플래폼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중이다.

그런 작가에게 이 지하도 장면 속에서 관심 있는 것은 ‘타는 곳’을 알려주는 사인보드뿐이다. 이 그림의 중경에 보이는 ‘타는 곳 장암 온수 7, 그리고 화살표’가 들어있는 사인물이다. 작가에게 확실하게 보이는 것은 이것뿐이다. 자신에게 지금 꼭 필요한, 유용한 시각 정보이기 때문이다. 그림 중간에 그려진 두 개의 사인물은 가장 똑똑하게 보인다. 작가의 급한 마음을 대신 보여주는 것이 사인물 뒤로 총총 걸음으로 뛰어가는 여인의 뒷모습이다.

‘빨강 안전 고깔’이란 제목이 붙은 또 다른 작품에서도 작가의 의도는 여지없이 드러난다. 흔한 도로 장면이다. 우리 머릿속에 이미 입력된 그런 풍경이다. 회색 톤의 3차선 이면도로 장면이다. 이 그림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제목이 지시한 대로 빨간색의 안전용 고깔이다. 인도가 따로 보이지 않는 위험한 상황을 안고 있는 그런 도로다. 이런 곳에서 살아 남으려면 안전을 위해 설치해 놓은 지시물을 확실하게 바라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이 그림에서는 빨간색이 유난히 잘 보인다. 회색 톤과의 대비 효과를 의도적으로 강조한 작가의 배려 때문이다.

이처럼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수많은 시각 정보 속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서글픈 현실에 대한 작가의 냉정한 시선이 보이는 대목이다.

전준엽(화가)


※이 기사는 뉴시스 발행 시사주간지 뉴시스아이즈 제138호(7월20일자)에 실린 것입니다.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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